루시와 대화하면 단박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에 나오는 ‘나’의 말은 그보다 조금 어렵습니다. 어려운 단어를 쓰거나 문장 구조가 복잡해서는 아닙니다. ‘나’는 여러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압니다. 여러 번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번역한 배수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페터라니의 글은 두 번의 탈출에서 나온다. 첫 번째는 국가라는 감옥에서의 탈출, 두 번째는 가족이라는 게토에서 자신의 삶을 향한 탈출.”, “다수의 언어로 발화되는 소수의 언어.”
‘나’의 가족은 서커스를 합니다. '배 속에서부터 가난과 부모의 근심을 겪은 아이들이 늙은 채 태어나는' 루마니아를 떠나왔습니다. 어머니가 호텔 욕조에서 닭을 도살합니다. “도살될 때 닭은 요란하게 국제적인 비명을 지르며, 우리는 어디서나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곡예사 어머니는 머리카락으로 공중에 매달립니다. 나도 자라면 머리카락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엉덩이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나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외국에서 우리 가족은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페터라니는 충분히 말하는 작가는 아닙니다. 부서진 유리의 파편은 서커스장에, 병원에, 학교에 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온 이민자 가족이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여기는 개가 사람보다 더 소중한 나라야! 상점 선반에 개사료가 가득하다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면, 다들 내가 드디어 미쳐 버렸다고 생각하겠지! 이 나라 욕실에서는 어디든 따뜻한 물이 나오고, 사람들 가슴에는 냉장고가 들어 있어!”라는 말을 듣는 곳임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봅니다. 온몸에서 등이 자라나는 아버지, 때때로 남자들 앞에서 내 언니인 척하는 어머니, 소 물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는 언니, 죽은 자들과 대화하는 이모, 우리가 이미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 선생님, 정액을 먹으라고 말하는 늙은 남자, 바닥에 오줌을 누는 나의 인형 안두자를요. 그러면서 “나는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느낌이 든다”고 씁니다.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책에 ‘자전적 소설’이라는 분류가 붙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읽기는 작가의 경험을 충분히 아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추정과 잠정이 있습니다.
이 책을 주변에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너무 좋다고요. 그런데 왜 좋은지는 늘 잘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책의 편집자는 이렇게 씁니다. “이야기가 최소한의 말들을 징검돌 삼아 뛴다”고요. 읽을 때마다 다른 순서와 모양으로 징검돌을 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