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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두고 하는 논쟁도 있지만, 번역 자체가 곧 논쟁인 것이다.”
꾸준히 번역 작업을 하다 보니 '번역'이라는 주제를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자주 한 질문은 '많고 많은 책 중에 왜 이 책을 번역해야 하지?'였습니다. '너무 좋았다' 이상의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번역을 한참 진행하던 중에는 도저히 이 문장은 한국어로 옮길 수 없다고 선언하며 포기해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명백한 오역을 저지르진 않았을지 늘 두렵고요.
'그 책은 번역이 별로야', '그 책은 번역이 아주 훌륭해'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인터넷 서점 후기에서도 번역에 관한 의견을 자주 접할 수 있죠. 잘 된 번역은 무엇이고 잘못된 번역은 무엇일까요? 매끄럽게 읽히면 잘 된 번역이고 그 반대면 잘못된 번역인 걸까요? 혹은 어디에도 정확한 번역이라는 건 없으니 번역은 무한히 자유로운 행위일까요?
이번 호는 번역이라는 행위의 속성을 고민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 두 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번역과 폭력』은 '갈등의 장소'로서 번역 행위를 다룹니다. 시 번역을 "언어 대 언어의 드잡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에는 작가에서 번역가로, 또 영어에서 이탈리아어로 자신의 언어를 확장해 나간 줌파 라히리가 쓴 '번역'에 대한 여러 편의 짧은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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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폭력』
티펜 사모요지음, 류재화옮김, 책세상
이미 말했듯이, 번역이 항상, 범보편적인 우주와의 합일을 희구하듯 타자와의 관계를 잘 맺고 싶어하는 차원에서 우리 시대가 지극히 좋아해 마지않는 만남, 나눔 같은 화해를 꾀하는 공간인 건 아니다. 번역은 우선, 그리고 당장에, 귀속 및 점유, 동화 같은 폭력적 작업이다.
이 책은 "번역을 칭송하거나 번역을 단순히 여러 문화와 다양한 사고방식의 만남 공간으로 보는 것도 이제 그만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르는 세계와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예 아닌 건 아니지만요. 이 주장을 보고 평소에 행하는 읽기와 옮기기를 생각했습니다. 번역된 글이 곧 원문과 같다거나 혹은 그것과 거의 다름없다고 의심 없이 읽을 때가 많았습니다. 문장이 잘 읽히지 않더라도 그건 한국어 문장 안에서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대강 넘기곤 했습니다. 독자로서 책을 읽을 땐 번역가의 존재를 뛰어넘고 곧장 작가와 만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으니까요.
옮기는 동안에는 그 글의 작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왜 저 단어가 아닌 이 단어를 썼을까, 왜 이 문장 다음에 이 이야기를 붙였을까, 이런 생각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생각이나 의도, 가끔은 삶에 대해 이렇게 긴 시간을 들여 생각할 일은 그다지 없으니 귀하다면 귀한 기회입니다. 한편, 문장을 보존하면서 이른바 '직역'하는 것과 독자들이 걸림없이 읽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윤문을 거친 문장 사이에서 언제나 씨름합니다. 하나의 표현을 선택함으로써 선택받지 못한 무수한 선택지를 버리게 됩니다. 글쓰기라는 행위가 단어를 고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번역은 어딘가에 정답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더욱 곤혹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티펜 사모요가 번역을 '대립'의 차원으로 다루는 까닭은 잘못된 번역으로 전쟁이 일어난 사례가 있거나 번역이 학살에 관여하고, 식민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출발어에서 발화된 것을 다른 발화어로 덮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작품을 넝마로 누더기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p.88)입니다. 번역하는 사람은 있는 것을 없애고 없는 곳에서 다시 있었던 곳으로 나아가길 반복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냅니다. 그 과정에서 옮기는 사람은 자신이 읽은 문장과 그것을 분해해 자기가 만들어 낸 문장 사이의 거리를 계속 측정합니다. 그 거리에서 만족을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억지로 다 명쾌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겠다는 것을 번역은 이제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한다"(p.296)는 말은 이 때문인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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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민 옮김, 마음산책
내가 아무것도 지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해방감을 준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원문에 매여 있으므로 더 큰 책임감을 자각한다. 아무것도 지어내지 않지만 모든 걸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번역서를 기획하고 만들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따라다니는 질문은 왜 이 책을 굳이 한국어로 번역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특히 '1세계'에서 영어로 출간된 책을 옮기는 일을 두고서는 그 질문을 여러 번 합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미 이 책이 좋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이 책을 읽었고, 그것을 옮기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안 하고는 배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책을 번역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입니다. 그 충동은 책을 옮기는 과정에서 더 심해지기도 합니다. 저자의 문장을 파헤치고 부서뜨리며 단어를 하나씩 다시 조립하다보면 아주 가끔, 작가와 매우 강력하게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기분은 퇴근 후에 다시 컴퓨터 앞에 앉을 만큼 중독적입니다. 줌파 라히리의 말처럼 번역이 가장 치열한 형태의 읽기와 다시 읽기인 건, 적어도 제 경험 안에서는 맞는 말 같습니다.
번역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저는 저자의 위치를 살피는 편입니다. 세상에 이미 많이 존재하는 말을 한국어로 또다시 옮기는 일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고 내키지 않습니다. 또 작가와 번역가 사이의 힘의 흐름도 의식합니다. 번역의 가치와 의미를 대단히 낭만화하여 설명하고 싶진 않지만 번역 노동에 대한 몰이해를 보면 즉각 항변하고 싶어집니다. 『번역과 폭력』에서도, 또 이 책에서도 번역 행위를 여성의 낮은 지위와 연결했던 담론들을 언급합니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여성의 지위와 신분이 남성보다 낮았던 전통적 여성성의 전형과 번역 관행이 일맥상통한다고 주장"(p.80)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줌파 라히리는 번역한 책에서 원작 작가에 대한 경애와 비평적 감상을 담아 서문을 썼고 이 때문에 비평가들로부터 한 차례 이상 꾸지람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고된 노동을 하되 단 눈에 띄지 말라는 요청이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글을 옮기다 보면 늘 미달하는 것 같은 느낌을 겪습니다. (모든 글쓰기가 그런 것 같긴 합니다.) 의식적으로 정답은 없다고 되뇌지만 정답이 있을 것만 같아 계속 망설입니다. 읽기 과정에서의 황홀함이 나를 거쳐 초라한 문장으로 옮겨졌을 때, 번역가로서의 능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가장 편하게, 오랫동안 써 온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글을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언어 행위를 낯설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언어에 대한 긴장도를 높였다는 줌파 라히리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기가 쓰는 문장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제안해볼만한 유용한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메일을 읽고 계신 여러분도 옮기고 싶으신 것이 있으신가요? 아님, 왜 이런 글이 옮겨지고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싶었던 적이 있으신가요? 나누고 싶으신 이야기나 제안이 있다면 편히 알려주세요. 무엇이 옮겨질 필요가 있다 혹은 그렇지 않다에 관한 이야기는 곧 우리의 삶과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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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호에서는 6월에 출간될 신간과 보도자료 내용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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